1998년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백악관 인턴으로 일하고 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부적절한
관계(not appropriate relationship)라고 묘사했다. 대통령의 정치 참모들이 고안해낸 이 말로 인해 빌 클린턴은
탄핵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상황을 규정하는적절한어휘를찾아내는일은 이토록 중요하다. 클린턴-르윈스키 사
건을위력에의한간음으로규정했다면 어땠을까. 권력형 성희롱으로 명명했다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처럼용어의정확한사용은문제를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동안 군대에서는 군대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해 군인의 기강이나 품위유지 문제의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국방부에서는 2014년까지도
이 문제를 성 군기 사고로 보고 성 군기 사고예방 지침을 발표한 바 있다.
관점이 확실히 바뀐 것은 2015년 3월 26일 국방부 성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내면서부터였다. 성 군기에서
성폭력으로 문제가 제대로 정의되니 해결 방안도 예방지침에서 종합대책으로 변화됐다.
군대 내 성폭력은 성을 매개로 한 폭력에 관한 문제다. 이점을분명히해야 실태조사와 진상파악,
이후 처벌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불필요한 혼란을 막을 수 있다. 일례로, 성폭력관련실태조사는
젠더관계(gender relations)에대한 조사이지 성관계(sexual relations)에 대한 조사가 아니어야 한다.
그렇다면 두 조사는 무엇이 다를까? 조사자가 문제를 부적절한 관계 여부, 문란과 품위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질문의 내용은 혼인여부, 사건이전의 교제관계, 조직 내 평판에서부터 호감의 표현, 연락에 대한 반응속도와
태도에 따른 착각과 오해, 옷차림에 대한 주관적 평가 등 가해자의 변명에서 통상 발견되는 이야기들이
조사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로 수집되게 된다.
반면, 젠더 관계를 묻는 설문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원하지 않는 성적 접촉이 있었는지, 가해자의
성별과 직위는 어떻게 되는지, 신고를 못 했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이후 2차 피해가 있었는지, 사건 당시의 동의
여부를 표명하기 어려울 만한 이유(음주, 약물 등)가 있었는지, 특정 성별에 대한 모욕과 멸시, 차별적 언행이 있었는지,
그러한 언행이 부대 전반에 영향을 얼마나 미친다고 생각하는지, 환영받지 못하는데도 성적 호의나 관심을 지속하고 있는지,
이에 대해 불편하고 힘들다고 말했을 때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등등.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는 군대 안에서 성별에 따른 권력관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것이 자유인의 의사를
현저하게 침해할 만한 조건으로 굳어지고 있는지, 그러한 조건들이 구체적인 개인의 행동에 대한 제약으로 이어지는
상황인지 등을 알아보고 이를 개선하는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좋은 질문은 좋은 답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또한, 적절하게 사용된 개념은 불필요한 혼란과 2차 피해를 막아준다.
성 군기 문란의 문제에서 성폭력 성희롱의 문제로 더 확실한 관점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