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한다고? 군대는 변하지 않아.” 성고충전문상담관(이하 상담관)으로서 군에서 근무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과 잘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게 했던 이 말은 상담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나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군에서 성폭력 전문가로 3년이 지난 지금, 내가 경험한 군은 어떤 모습일까?
2018년 국방부 ‘성범죄 특별대책 TF’ 활동 기간 중 신고된 사건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는 영관장교와 원·상사 등이 76%이고 피해자 대부분은 중·하사와 중·소위로 94%를 차지했다. 가해자보다 군 경험이 많지 않은 피해자들은 조직 내 지지기반이 부족해 고립되기 쉬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 대부분 사회초년생이어서 자신이 어떤 해결책을 원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담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성고충전문상담관 제도는 군내 성폭력 사건의 특성상 독립적이고 비밀이 보장된 전문인력에 의한 피해자 지원의 필요에 따라 2014년부터 민간인으로 구성돼 시행되고 있다. 상담관은 피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피해자 지원시스템에 대한 포괄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피해자의 다양한 지원 소요를 확인하고 여러 사건해결 방법에 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 후 피해자 스스로 적절한 해결방법을 결정하도록 돕는다. 성폭력은 사건 초기 지원 여부에 따라 2차 피해와 치유·회복의 정도가 다르므로 사건 발생 즉시 상담관에게 연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군에서는 성폭력 발생 즉시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한다. 최소한의 계통에만 보고하고, 최대한 신속하게 사건을 진행한다. 하지만 사건 이후 전형적인 2차 피해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피해 상황에서 ‘NO’라고 말하지 않아서, 즉시 신고하지 않아서, 사건 진행 도중 합의해서 등, 피해자는 어떤 행동을 해도 조직 내 비난의 화살을 받는 경우가 많다. 사건을 지켜보는 이들은 앞으로 피해자를 도와주면 도리어 내가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사건 발생 시 지휘관의 위치에서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2차 피해를 막고 피해자와 조력자들의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군내 구성원들이 할 역할들을 고민하기 위해서라도 상담관과의 긴밀한 연계가 필요하다.
상담관으로 근무하면서 남군들을 교육할 때 자신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한다거나 군대를 잘 모르는 민간인이 군인을 가르치려 드는 무례한 행동으로 여기는 사례가 있다. 사건 발생 후 필요한 지휘 조언을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군은 성폭력 문제의 전문가나 유일한 판단자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계급이 높다고 해서 성폭력 문제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군의 성차별적 위계 문화와 권한남용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동안 마련한 수많은 성폭력 관련 정책과 제도들은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내 얘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성 평등의 군 문화를 위한 변화는 지금, 우리가 시작해야 할 것이다.